그래픽카드를 고를 때 연산 성능은 열심히 비교하면서 VRAM 용량은 대충 넘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둘은 성격이 다르다. 연산이 부족하면 프레임이 고르게 낮아지지만, VRAM이 부족하면 순간순간 무너진다. 그리고 후자는 더 비싼 GPU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VRAM은 '작업대'다
VRAM은 그래픽카드에 붙은 전용 메모리다.
게임이 화면을 그리려면 텍스처, 모델, 그림자 정보 같은 데이터를 미리 올려둬야 한다.
이걸 올려두는 공간이 VRAM이다. 작업대에 비유하면 이해가 빠르다.
작업대가 좁으면 도구를 계속 꺼냈다 넣었다 해야 한다. 손이 아무리 빨라도 이 왕복이 발목을 잡는다.
GPU 연산 성능이 손의 속도라면, VRAM은 작업대의 넓이다.
그래서 둘은 서로를 대신하지 못한다. 좁은 작업대는 빠른 손으로 보완되지 않는다.
해상도별 기준선
영상: Daniel Owen 유튜브 채널
해상도가 올라가면 텍스처와 버퍼가 함께 커진다. 그래서 기준도 계단식으로 오른다.
1080p는 8GB가 최소, 12GB면 넉넉하다.
이 해상도에서도 4GB와 6GB 카드는 이미 한계다. 일부 최신 게임에서 고해상도 텍스처를 아예 불러오지 못하는 사례가 나온다.
1440p는 12GB가 최소, 16GB가 권장이다.
여기서 8GB는 버겁다. 사이버펑크 2077, 몬스터 헌터 와일즈, 호그와트 레거시를 1440p 울트라로 돌리면 12GB에 근접한다.
스타필드·사이버펑크·알란 웨이크 2는 같은 해상도에서 10GB를 넘기는 일이 흔하다.
4K는 16GB가 최소다. 울트라 텍스처와 앞으로 나올 타이틀까지 감안하면 24GB가 여유 있다.
지금 새로 산다면 1080p·1440p 모두 12GB를 기본선으로 잡는 편이 안전하다.
모자라면 벌어지는 일
영상: Hardware Unboxed 유튜브 채널
VRAM이 넘치면 데이터가 시스템 메모리로 밀려난다.
시스템 메모리는 VRAM보다 훨씬 느리다. 이 왕복이 생기는 순간 화면이 걸린다.
증상은 네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스터터링이다. 갑자기 툭툭 끊긴다. 특히 새 지역에 진입하거나 시야가 확 열릴 때 심하다.
둘째, 텍스처 저하다. 고해상도 텍스처를 포기하고 저해상도로 대체한다. 벽이나 바닥이 뭉개져 보인다.
셋째, 최저 프레임 붕괴다. 평균 프레임은 멀쩡한데 1% 최저값이 무너진다. 벤치마크 숫자는 괜찮은데 실제로는 불편한 이유가 여기 있다.
넷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GPU 성능으로 보완되지 않는다.
12GB가 필요한 게임에 8GB 카드를 쓰면, 그 카드의 연산 성능이 아무리 높아도 스터터링이 사라지지 않는다. 병목이 성능이 아니라 용량이기 때문이다.
숫자를 키우는 것들
같은 게임·같은 해상도라도 설정에 따라 사용량이 크게 흔들린다.
가장 큰 변수는 텍스처 품질이다. 다른 옵션과 달리 텍스처는 VRAM만 먹고 연산은 거의 안 먹는다.
그래서 VRAM이 넉넉하면 텍스처는 올려도 프레임이 잘 안 떨어진다. 반대로 부족하면 이 옵션부터 내려야 한다.
실측으로도 확인된다. 위쳐 3 벤치마크에서 텍스처를 최저에서 울트라로 올렸을 때 늘어난 VRAM은 300MB 미만이었고, 프레임 변화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VRAM만 여유롭다면 텍스처는 올려두는 게 이득이다. 화면은 좋아지는데 프레임은 그대로다.
레이트레이싱도 추가 데이터를 요구한다. 켜면 사용량이 한 단계 뛴다.
프레임 생성 계열 기능도 프레임을 저장할 버퍼를 더 쓴다.
반대로 업스케일링은 내부 렌더 해상도를 낮추므로 사용량을 줄여준다. DLSS·FSR·XeSS의 차이는 따로 정리해 뒀다.
즉 같은 8GB 카드라도 업스케일링을 켜고 텍스처를 한 단계 낮추면 버티는 게임이 늘어난다.
실무 기준으로는 이렇게 통용된다. 8GB 이상이면 높음, 6GB면 중간, 4GB 이하면 낮음이 무난하다.
'사용량'과 '필요량'은 다르다
모니터링 프로그램에 뜨는 숫자를 그대로 믿으면 오해가 생긴다.
게임은 VRAM이 남으면 미리 채워두는 경향이 있다. 나중에 쓸지도 모를 데이터를 캐시해 두는 것이다.
게임은 쓰지 않는 데이터도 일부러 붙들고 있는다. 필요할 때 다시 불러오는 비용이 크기 때문에, 메모리를 놓아주지 않는 쪽이 유리해서다.
그래서 24GB 카드로 돌리면 14GB를 쓰고, 12GB 카드로 같은 게임을 돌리면 10GB만 쓰기도 한다.
이때 14GB는 필요량이 아니라 여유분을 쓴 것이다.
진짜 부족한지 판단하려면 숫자보다 증상을 봐야 한다. 스터터링이 나는지, 텍스처가 뭉개지는지다.
표기도 헷갈린다. 할당(allocated)과 실제 사용(used)을 구분해 보여주는 도구를 쓰는 편이 낫다.
지금 사야 한다면
정리하면 이렇다.
1080p로 오래 쓸 계획이라면 8GB도 당장은 돌아간다. 다만 신작 대응을 생각하면 12GB가 마음 편하다.
1440p가 목표라면 12GB 미만은 권하지 않는다. 지금 기준으로도 빠듯하고, 앞으로는 더 그렇다.
4K라면 16GB부터 시작이다.
여기에 시장 변수가 하나 붙는다. RTX 50 슈퍼가 사실상 취소된 원인도 3GB 메모리 모듈 수급 문제였다.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고용량 카드의 가격이 먼저 뛴다. 국내 그래픽카드 값이 크게 오른 배경에도 이 흐름이 있다.
같은 값이면 연산 성능이 조금 낮아도 VRAM이 더 큰 쪽을 고르라는 조언이 나오는 이유다.
연산 부족은 옵션을 내려 타협할 수 있지만, 용량 부족은 타협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