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소개에 '로그라이크'라는 말이 붙는 빈도는 계속 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이 로그라이크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말한다. 어떤 게임은 '로그라이트'라고 불리고, 그 차이를 두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혼란에는 분명한 기원이 있다. 1980년 대학생들이 만든 던전 게임 하나가 어떻게 지금 인디 시장에서 가장 흔한 문법이 됐는지, 그 45년의 계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 게임 사례로 짚었다.

정의부터 — 로그라이크는 '어려운 게임'이 아니라 '두 가지 규칙'이다

바인딩 오브 아이작의 던전 플레이 화면
▲ '아이작'은 로그라이크의 구조를 액션으로 옮긴 초기 사례다. 사진: Nicalis / Edmund McMillen

먼저 흔한 오해부터 정리하고 가자. 로그라이크는 '무작위성이 있는 어려운 게임'의 동의어가 아니다.

장르 이름이 따로 붙은 이유는 1980년에 나온 한 게임이 채택한 두 가지 규칙이 이후 반복해서 재사용됐기 때문이다.

절차적 생성(procedural generation)과 영구적 죽음(permadeath)이다. 플레이할 때마다 지형이 새로 만들어지고, 캐릭터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나머지는 장르마다, 게임마다 전부 다르게 풀 수 있다. 턴제일 수도 실시간일 수도 있고, 텍스트일 수도 3D일 수도 있고, 던전일 수도 우주선일 수도 카드 덱일 수도 있다.

그래서 로그라이크는 특정 장르라기보다 다른 장르 위에 얹을 수 있는 설계 틀에 가깝다. 액션, 카드 게임, 경영 시뮬레이션, 슈팅 게임 전부에 이 틀이 이식됐다.

다만 그 틀을 얼마나 원형 그대로 지키느냐를 두고 '로그라이크'와 '로그라이트'라는 두 이름이 갈라졌다. 이 글은 그 갈림길이 어디서, 왜 생겼는지를 실제 게임들로 추적한다.

장르 이름이 게임 제목 하나에서 나온 사례는 드물지 않다. '소울라이크'가 '데몬즈 소울'에서 나온 것과 같은 방식이다. 다만 로그라이크는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됐고, 가장 널리 이식된 축에 속한다.

1980년 '로그(Rogue)' — 저장 용량 부족이 만든 규칙

1980년작 로그의 실제 게임 화면 - 문자와 기호로 그려진 던전과 방, 노란 캐릭터 아이콘
▲ 장르 이름의 출발점이 된 1980년작 '로그'. 방과 통로를 문자만으로 표현했다. 사진: Michael Toy, Glenn Wichman, Ken Arnold / Wikimedia Commons

영상: Nostalgia Nerd 유튜브 채널

장르 이름의 출처는 단순하다. 1980년, UC 산타크루즈 학생이던 마이클 토이와 글렌 위치맨이 만든 '로그(Rogue)'라는 게임이다. 이후 토이가 UC 버클리로 옮기며 그곳에서 만난 켄 아놀드가 합류해 함께 다듬었다.

유닉스 환경에서 돌아갔고, 화면은 문자(ASCII)로 그려졌다. 주인공은 @ 기호였고 몬스터는 알파벳, 아이템은 기호였다.

이 게임의 구조가 이후 수십 년을 결정했다. 그런데 이 구조는 예술적 선택이 아니라 기술적 제약의 결과였다.

당시 컴퓨터는 저장 공간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부족했다. 던전 수백 개를 미리 만들어 저장해 둘 여유가 없었다.

대신 개발자들은 지형을 만드는 규칙(알고리즘)만 저장해 두는 방식을 택했다. 실행할 때마다 그 규칙에 따라 던전이 새로 조립된다. 이것이 절차적 생성이다.

영구적 죽음 역시 비슷한 배경에서 나왔다. 세이브 파일을 여러 개 관리할 저장 공간이 부족했던 데다, 당시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에서 흔했던 '죽으면 저장 지점에서 다시 시작' 방식이 게임의 긴장감을 없앤다는 문제의식도 있었다. '로그'는 죽으면 세이브 자체를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 조합이 만들어 낸 감각이 핵심이다. 매 판이 처음이고, 모든 선택에 무게가 실린다.

'로그'는 이후 대학가 유닉스 시스템을 통해 입소문으로 퍼졌다. 상업 게임이 아니었는데도 1980년대 내내 대학 컴퓨터실의 대표적인 '몰래 하는 게임' 자리를 차지했다.

원류의 계보 — 넷핵부터 케이브스 오브 큐드까지

넷핵: 레거시의 던전 화면 - 문자 기반 그리드에 캐릭터와 몬스터, 아이템이 기호로 표시된 모습
▲ 1987년작 '넷핵'은 지금도 활발히 갱신되는 오리지널 로그라이크 계보의 대표작이다. 사진: FrozenCrate
케이브스 오브 큐드의 넓은 야외 지형 화면 - 강과 숲, 산맥이 타일 기반으로 표현된 모습
▲ '케이브스 오브 큐드'는 2015년 얼리 액세스로 시작해 2024년 12월 정식 1.0으로 출시됐다. 원류 로그라이크가 지금도 신작으로 완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Freehold Games

'로그'를 따라 만든 게임들이 곧바로 이어졌다.

1987년 '넷핵(NetHack)'은 전 세계 개발자들이 온라인으로 협업해 만든 오픈소스 프로젝트였다. 몬스터를 길들이고, 물건을 조합하고, 특정 직업으로만 갈 수 있는 히든 퀘스트가 있는 등 시스템 밀도가 극단적으로 높다. 지금도 커뮤니티가 매년 새 버전을 내놓는다. 최근에는 'NetHack: Legacy'라는 이름으로 스팀에도 정식 출시됐다.

1990년 '앙밴드(Angband)'는 J.R.R. 톨킨의 세계관을 빌려, 끝없이 깊어지는 던전 하나를 반복해서 내려가는 구조를 택했다.

2006년 '던전 크롤 스톤 수프(Dungeon Crawl Stone Soup)'는 넷핵의 복잡함을 계승하면서도, 불필요한 반복 작업을 줄이는 방향으로 다듬어져 지금도 원류 로그라이크 팬들 사이에서 표준처럼 통한다.

2009년 '브로그(Brogue)'는 정반대 방향을 택했다. 규칙을 최대한 단순화하고, 대신 조합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적게 배우고 깊게 판다'는 설계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 계보가 완전히 멈춘 것도 아니다. 2015년 7월 얼리 액세스로 시작한 '케이브스 오브 큐드(Caves of Qud)'는 문자와 타일 그래픽을 절충하고, 돌연변이 생명체가 뒤섞인 방대한 세계관을 얹었다. 개발 시작부터 따지면 15년 만인 2024년 12월 정식 1.0으로 출시되며, 원류 로그라이크가 지금도 새로 완성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로그라이크 서사 진영에서 손꼽히는 완성도로 평가받는다.

2013년작 '카타클리즘: 다크 데이즈 어헤드(Cataclysm: Dark Days Ahead)'는 좀비 아포칼립스 생존을 로그라이크 문법으로 풀어낸 오픈소스 프로젝트로, 지금도 커뮤니티 갱신이 계속된다.

이 계열은 지금도 살아 있다. 다만 대중적인 얼굴은 아니었다. 문자 화면과 극단적인 복잡성은 진입 장벽이 높았고, 대부분 무료 또는 오픈소스로 배포돼 상업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2008년, 정의를 한 번 못 박았다 — 베를린 해석

"무엇이 로그라이크인가"를 두고 논쟁이 길어지자, 개발자들이 직접 정리에 나섰다.

2008년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로그라이크 개발 콘퍼런스에서 나온 것이 '베를린 해석'이다.

여기서 높은 가치 요소 아홉 가지가 제시됐다. 하나씩 풀면 이렇다.

① 무작위 환경 생성 — 던전이 매번 새로 만들어진다. ② 영구적 죽음 — 죽으면 그 캐릭터는 끝이다. ③ 턴제 — 실시간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움직여야 세계도 움직인다. ④ 격자 기반 — 캐릭터와 몬스터가 정해진 칸 위에서만 이동한다.

⑤ 비모달(non-modal) 구조 — 전투와 탐험이 별도 화면으로 분리되지 않고 같은 화면에서 이어진다. ⑥ 복잡성 — 아이템을 조합하고 여러 시스템이 서로 얽힌다. ⑦ 자원 관리 — 식량, 마법력 같은 자원을 아껴 써야 한다.

⑧ 전투 중심 — 몬스터를 죽이는 것이 핵심 활동이다. ⑨ 탐색과 발견 — 아이템의 정체를 직접 써 보며 알아내야 한다.

여기에 낮은 가치 요소 여섯 가지가 덧붙었다. 단일 캐릭터, 플레이어와 같은 규칙을 따르는 몬스터, 전술적 도전, ASCII 화면, 던전 배경, 수치 노출이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체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베를린 해석은 "많이 해당할수록 로그라이크에 가깝다"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하나라도 빠지면 탈락시키는 기준이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반대로 쓰였다. 항목을 세어 가며 "이건 로그라이크가 아니다"라고 판정하는 데 동원됐다.

특히 턴제와 격자 기반이 걸림돌이었다. 실시간 액션으로 만든 게임은 이 기준으로는 자동 탈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확히 그런 게임이 곧이어 등장했다.

왜 20년 넘게 대중화되지 못했나

베를린 해석이 나온 뒤에도 로그라이크는 여전히 소수 취향이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가장 큰 장벽은 화면이었다. 문자 하나가 캐릭터, 몬스터, 함정, 아이템을 전부 대신하는 화면은 익숙해지기까지 상당한 학습이 필요했다.

두 번째는 복잡성 그 자체였다. 넷핵 하나를 제대로 플레이하려면 수백 개의 조작 명령어와 아이템 상호작용을 알아야 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세 번째는 영구적 죽음의 무게였다. 원류 로그라이크는 한 판에 수십 시간이 걸리기도 하는데, 그 시간이 한 번의 실수로 통째로 사라진다. 숙련자에게는 짜릿함이지만, 입문자에게는 그저 가혹했다.

그래서 2000년대까지 로그라이크는 PC 통신·대학 서버 문화를 공유한 마니아층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례도 드물었다.

이 흐름을 바꾼 것은 새로운 규칙의 발명이 아니라, 기존 규칙 중 일부를 과감히 버리는 시도였다. 그 시작점이 2008년, 베를린 해석이 나온 것과 같은 해에 조용히 배포된 무료 게임 하나였다.

'스펠렁키' — 턴제를 버리고 실시간으로 넘어온 순간

스펠렁키 2에서 탐험가가 횃불이 켜진 동굴 유적을 탐험하는 장면
▲ '스펠렁키'는 절차적 생성과 영구적 죽음을 실시간 플랫포머로 옮긴 첫 성공 사례다. 사진: Mossmouth
스펠렁키 2에서 캐릭터가 함정과 몬스터가 가득한 동굴을 이동하는 장면
▲ 죽음의 원인은 대부분 무작위 지형 배치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판단 착오다. 사진: Mossmouth

2008년, 데릭 유가 개인 프로젝트로 만들어 무료로 배포한 '스펠렁키'가 그 시작이다.

이 게임은 절차적 생성과 영구적 죽음이라는 로그라이크의 핵심 두 가지는 그대로 가져왔다. 대신 턴제와 격자 기반을 완전히 버렸다. 캐릭터는 실시간으로 뛰고 구르고 점프하는 2D 플랫포머 방식으로 움직인다.

이 선택 하나가 진입 장벽을 크게 낮췄다. 명령어를 외울 필요 없이, 방향키와 점프 버튼만으로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조작이었다.

그럼에도 난이도는 결코 낮지 않았다. 오히려 '스펠렁키'는 한 대만 맞아도 위험한 극단적인 긴장감으로 유명해졌다. 다만 그 어려움의 원인이 대부분 플레이어의 판단 착오였다는 점이 달랐다. 무작위 함정 배치가 아니라, 서두르다 낭떠러지로 뛰어들거나 폭탄을 잘못 쓰는 식이었다.

2012년에는 확장·개선판이 엑스박스 라이브 아케이드로 출시됐고, 이후 여러 플랫폼으로 이식되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PC게이머의 올해의 게임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후속작 '스펠렁키 2'는 2020년 출시돼 전작의 틀을 유지하면서 세계관과 지형 종류를 대폭 늘렸다.

이 시점부터 커뮤니티는 새로운 말이 필요해졌다. 베를린 해석의 조건 중 일부만 충족하는 이런 게임들을, 원류와 구분하기 위해 '로그라이크-라이트(Roguelike-lite)', 줄여서 '로그라이트(Roguelite)'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메타 프로그레션의 발명 — '로그 리거시'가 만든 진짜 분기점

로그 리거시에서 캐릭터가 성 내부의 감옥 같은 방을 탐험하는 장면
▲ '로그 리거시'는 스스로를 '로그라이크'가 아닌 '로그라이트'라고 소개한 첫 게임이다. 사진: Cellar Door Games
FTL: 페스터 댄 라이트에서 우주선 내부 구조와 승무원, 적함 정보가 함께 표시된 전투 화면
▲ 같은 해 나온 'FTL: 페스터 댄 라이트'도 해금형 진행으로 로그라이트 확산에 힘을 보탰다. 사진: Subset Games

영상: Game Maker's Toolkit 유튜브 채널

실시간 액션으로 넘어온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결정적인 변화는 2012~2013년, 연달아 나온 두 게임이 터뜨렸다.

먼저 2012년 9월, 서브셋 게임즈의 'FTL: 페스터 댄 라이트'다. 우주선을 조종해 은하를 가로지르는 이 게임은 킥스타터에서 목표액의 20배를 모금하며 화제를 모았다. 특정 도전 과제를 달성하면 새로운 함선이 영구적으로 해금되는 방식을 채택해, 죽어도 다음 판에 뭔가 남는다는 감각을 초기 형태로 선보였다.

결정타는 이듬해에 나왔다. 2013년 6월, 셀러 도어 게임즈의 '로그 리거시(Rogue Legacy)'다. 이 게임은 죽으면 성 전체가 초기화되지만,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죽은 기사의 후손이 새로 등장해 성에 다시 도전하는데, 이때 죽으면서 모은 재화로 영구적인 능력치 강화를 미리 사 둘 수 있다. 다음 후손은 그만큼 더 강한 상태로 시작한다.

개발사는 이 게임을 소개하며 스스로 '로그라이크'도 '로그라이크-라이크'도 아닌 새 이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나온 말이 지금 널리 쓰이는 '로그라이트(rogue-lite)'다.

이 변화가 장르의 성격을 완전히 바꿨다. 실력이 늘어야만 진행되던 게임이, 반복하면 조금씩 진행되는 게임이 된 것이다.

정리하면 메타 프로그레션(meta progression), 즉 '죽어도 영구히 남는 성장'의 유무가 지금 로그라이크와 로그라이트를 가르는 가장 실질적인 기준이 됐다.

대중화 1세대 — 아이작, 엔터 더 건전, 데드 셀

엔터 더 건전에서 캐릭터가 총알 세례를 뚫고 거대한 보스와 교전하는 장면
▲ '엔터 더 건전'은 탄막을 피하는 동작 자체를 능력치처럼 다뤘다. 사진: Dodge Roll / Devolver Digital
데드 셀에서 캐릭터가 검을 휘두르며 적을 공격하는 2D 액션 장면
▲ '데드 셀'은 메트로배니아 구조와 로그라이트 진행을 결합해 개발사조차 '로그라이크-배니아'라 소개했다. 사진: Motion Twin

'스펠렁키'와 '로그 리거시'가 문법을 만들었다면, 이 문법을 대중 시장으로 끌어올린 것은 그다음 세대다.

2011년 '바인딩 오브 아이작'은 절차적 던전과 영구적 죽음에, 다양한 아이템 조합으로 캐릭터 능력을 실시간으로 바꾸는 시스템을 결합했다. 개발자 에드먼드 맥밀런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미술과 맞물려 컬트적 인기를 얻었고, 2014년 리메이크판 '리버스'로 완성도를 크게 끌어올렸다.

2016년 '엔터 더 건전'은 총기 액션과 결합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총알이 화면을 뒤덮는 '탄막'을 구르기 한 번으로 피해내는 손맛이 핵심이었고, 무기 하나하나에 서사적 농담을 얹은 아이템 디자인으로 호평받았다.

2018년 '데드 셀'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능력을 얻어 막혔던 길을 여는 메트로배니아 구조와 로그라이트의 죽음 설계를 결합한 것이다.

개발사 모션 트윈은 이 조합을 설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로그라이크-배니아(Roguelike-vania)'라 소개했다. 장르 이름이 계속 새로 조합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문법이 얼마나 다양한 곳에 이식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세 게임은 공통적으로 한 판이 짧고, 매번 다른 조합이 나오며, 죽어도 무언가는 남는다는 원칙을 공유한다. 지금 '로그라이크'라는 태그를 달고 나오는 인디 게임 대다수가 이 세 게임 중 하나의 후예에 가깝다.

카드로 만든 로그라이크 — 슬레이 더 스파이어와 발라트로

슬레이 더 스파이어의 카드 전투 화면
▲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덱빌딩과 로그라이트 구조를 결합했다. 사진: Mega Crit
발라트로에서 카드 패와 조커 카드가 초록색 테이블 위에 배치된 화면
▲ '발라트로'는 포커 족보에 로그라이크의 반복 구조를 결합해 1인 개발로 500만 장 넘게 팔았다. 사진: LocalThunk

로그라이크의 틀은 던전이나 총싸움에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카드 게임과 결합한 갈래도 하나의 독립된 흐름이 됐다.

2019년 '슬레이 더 스파이어'가 그 출발점이다. 매판 무작위로 등장하는 카드를 골라 덱을 짜고, 그 덱으로 층층이 쌓인 탑을 오르며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 게임이 증명한 것은 절차적 생성이 꼭 '지형'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매판 다르게 주어지는 카드 선택지 자체가 절차적 생성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이 성공 이후 '몬스터 트레인', '인스크립션' 같은 덱빌딩 로그라이크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리고 2024년, 이 흐름의 정점에 가까운 게임이 나왔다. 1인 개발자 로컬선더(LocalThunk)가 만든 '발라트로'다.

카드 게임의 소재를 덱빌딩용 오리지널 카드가 아니라 포커 족보로 가져왔다. 원페어, 플러시 같은 익숙한 족보에 '조커'라는 특수 카드를 조합해 점수를 극단적으로 불려나가는 구조다.

출시 한 달 만에 100만 장을 팔았고, 2025년 초 기준 누적 500만 장을 넘겼다. 1인 개발 로그라이크가 도달할 수 있는 상업적 성과의 새로운 기준을 세운 사례로 꼽힌다.

서사형 로그라이트 — '하데스'와 '하데스 2'가 푼 숙제

하데스의 전투 장면
▲ '하데스'는 반복 플레이를 서사로 흡수했다. 사진: Supergiant Games
하데스 II의 전투 장면
▲ 후속작에서도 반복 구조는 그대로다. 2025년 9월 정식 1.0으로 출시됐다. 사진: Supergiant Games

로그라이크·로그라이트가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가 하나 있었다. 서사다.

계속 죽고 처음(비슷한 지점)으로 돌아가는 구조에서는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주인공이 매번 기억을 잃은 것처럼 리셋되는 모순을 대부분의 게임은 그냥 넘어갔다.

2020년 슈퍼자이언트 게임즈의 '하데스'는 이 모순을 정면으로 끌어안았다. 주인공 자그레우스는 저승의 왕자이고, 죽으면 정말로 집(저승)으로 돌아온다. 죽음 자체가 설정과 완벽히 들어맞는다.

여기에 매번 죽고 돌아올 때마다 등장인물들과 짧은 대화가 이어지며 서사가 조금씩 진행되는 구조를 얹었다. '몇 번 죽었는지'가 곧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봤는지'가 되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 접근은 압도적인 평가로 돌아왔다. 특히 2021년에는 SF·판타지 문학 최고 권위상인 휴고 어워드에서 '애니멀 크로싱: 뉴 호라이즌',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 'FF7 리메이크' 같은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사상 최초로 게임 부문을 수상한 비디오 게임이 됐다. 로그라이트도 깊은 서사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문학계로부터도 증명받은 셈이다. 2026년에는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가 같은 부문을 수상하며, 게임이 이 문학상을 받는 것이 더 이상 이례적인 일이 아님을 보여줬다.

후속작 '하데스 2'는 2024년 5월 얼리 액세스로 시작해, 2025년 9월 25일 정식 1.0으로 출시됐다. 주인공을 자그레우스의 여동생 멜리노에로 바꾸고, 마법 체계를 새로 짜 넣으면서도 반복 죽음을 서사에 흡수하는 핵심 설계는 그대로 유지했다.

새 하위장르, 뱀서라이크 — '뱀파이어 서바이버즈'가 다시 한번 규칙을 깼다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에서 캐릭터 주변으로 수백 마리의 박쥐 몬스터가 몰려드는 화면
▲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는 조작 자체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해 새로운 하위장르를 만들었다. 사진: poncle
브로타토에서 감자 캐릭터가 몰려드는 외계 생물체 무리와 맞서 싸우는 화면
▲ '브로타토'를 비롯해 뱀서라이크 계열은 짧은 개발 주기로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 사진: Blobfish

2021년, 로그라이크 계보에서 또 하나의 파격이 나왔다. 이탈리아의 소규모 개발사 폰클(poncle)이 만든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다.

이 게임은 조작을 극단적으로 줄였다. 이동만 플레이어가 하고, 공격은 전부 자동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수백 마리의 적을 무기 이펙트로 갈아 버리는 것이 핵심 쾌감이다.

절차적 요소는 무기 조합과 레벨업 선택지에 집중된다. 매판 무작위로 주어지는 강화 카드를 골라 조합하면, 특정 무기끼리 결합해 화면을 뒤덮는 '진화' 무기가 완성된다.

2021년 12월 얼리 액세스로 시작해 헐값에 가까운 가격에도 입소문만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2022년 10월 정식 출시됐다.

이 성공은 '뱀서라이크(survivors-like)'라는 새로운 하위장르를 만들어 냈다. 로그라이크의 절차적 생성·죽음·메타 프로그레션 뼈대를 유지하면서, 여기에 '수백 마리를 자동 공격으로 학살한다'는 새로운 재미를 얹은 갈래다.

2023년 '브로타토'를 비롯해 이 공식을 따르는 게임이 스팀에 쏟아졌다. 개발 난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명확한 재미 공식이 있어, 지금 로그라이크 계열 중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하위장르로 꼽힌다.

장르 혼종 — 경영·잠입·다이빙과 결합한 사례들

컬트 오브 더 램에서 뿔 달린 양 캐릭터가 해골 신도들에 둘러싸인 채 제단 앞에 서 있는 장면
▲ '컬트 오브 더 램'은 로그라이트 던전 공략과 교단 경영 시뮬레이션을 오갔다. 사진: Massive Monster
리스크 오브 레인 2에서 플레이어들이 거대한 로봇형 보스와 야외 지형에서 전투하는 장면
▲ '리스크 오브 레인 2'는 2D 로그라이크를 3인칭 슈팅으로 옮기고 최대 4인 협동을 더했다. 사진: Hopoo Games
데이브 더 다이버에서 잠수부가 산호초와 물고기가 가득한 바닷속을 탐험하는 장면
▲ '데이브 더 다이버'의 심해 탐험 파트에도 절차적 생성과 자원 관리라는 로그라이크 문법이 녹아 있다. 사진: MINTROCKET

장르가 성숙하면서, 로그라이크는 이제 완전히 다른 장르 안의 '한 파트'로도 이식되고 있다.

2022년 '컬트 오브 더 램'은 낮에는 신도를 관리하는 마을 경영 시뮬레이션을, 밤(정확히는 던전 진입 시)에는 절차적으로 생성되는 던전을 도는 로그라이트 액션을 오간다. 두 장르가 한 게임 안에서 순환 구조로 맞물린 사례다.

2020년 '리스크 오브 레인 2'는 원작인 2013년 2D 로그라이트를 3인칭 3D 슈팅으로 확장하며, 최대 4인 협동 플레이를 정식 지원했다. 로그라이트가 혼자 하는 장르라는 통념도 이 게임 이후 깨졌다.

국내 개발사 넥슨의 민트로켓이 만든 '데이브 더 다이버'(2023)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문법을 빌렸다. 매번 조금씩 다르게 배치되는 심해 지형을 탐사하며 산소와 작살 같은 제한된 자원을 관리하는 파트가, 초밥집 경영이라는 완전히 이질적인 장르와 하루 주기로 맞물려 돌아간다.

이런 혼종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하나다. 로그라이크의 핵심 뼈대(절차적 생성 + 자원 관리 + 반복되는 위험)는 어느 장르에도 이식 가능한 범용 부품이 됐다는 사실이다.

왜 이 구조가 인디 개발에 이렇게 잘 먹히나

인디 개발 쪽에서 이 구조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데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다.

적은 콘텐츠로 긴 플레이 시간을 만든다. 지형과 아이템 조합이 매번 달라지니, 손으로 만든 스테이지 수보다 훨씬 오래 굴러간다. 방 20개짜리 던전이 조합에 따라 수백 가지 다른 경험이 된다.

소규모 팀에게 이것은 결정적인 장점이다. 중견 스튜디오조차 자금난에 몰리는 환경에서는 더 그렇다. '발라트로'와 '뱀파이어 서바이버즈'가 모두 극소수 인원(사실상 1인)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용자 쪽 이유도 있다. 한 판이 짧다. 뱀서라이크는 15분, 로그라이트 액션은 20~40분이면 한 사이클이 끝나는 구조라 부담이 적다.

그리고 매번 다른 조합이 나온다. 같은 게임을 다시 켜는 이유가 계속 생긴다. 이는 스트리밍·영상 콘텐츠와도 궁합이 좋다. 매 회차가 새로운 하이라이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메타 프로그레션이 붙은 로그라이트는 여기에 장기 리텐션까지 확보한다. '조금만 더 하면 다음 해금이 나온다'는 감각은 게임을 계속 켜게 만드는 강력한 장치다.

결국 로그라이크·로그라이트 구조는 적은 자원으로 긴 수명과 반복 재생을 동시에 확보하는 몇 안 되는 설계 해법이다. 인디 시장에서 이 장르가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질적인 약점 — 서사, 운, 그리고 피로감

다만 이 구조에는 반복되는 약점도 있다.

서사를 담기 어렵다. '하데스'가 예외적으로 이 문제를 풀었을 뿐, 대다수 로그라이크·로그라이트는 여전히 배경 설정 몇 줄과 반복되는 짧은 대사로 이야기를 대신한다.

운의 비중도 고질적인 문제다. 초반 아이템이나 카드 운이 나쁘면, 실력과 무관하게 판이 무너진다. 이 균형을 잡는 것이 이 장르 설계의 핵심 난제로 꼽힌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와 '발라트로'처럼 정교한 확률 설계로 호평받는 게임과, '운게임'이라는 비판을 받는 게임의 차이가 여기서 갈린다.

반복 피로도 있다. 같은 초반 구간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해야 하는 구조 특성상, 초반 몇 분이 지루하면 게임 전체가 지루해진다. 잘 만든 로그라이트일수록 초반 템포를 짧고 다채롭게 유지하는 데 공을 들인다.

장르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뱀서라이크는 비슷한 공식의 게임이 스팀에 매주 쏟아지면서, 신작이 눈에 띄기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 장르가 유지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약점을 상쇄할 만큼 반복 재생 가치가 크다. 잘 설계된 로그라이크 한 편은 손으로 만든 콘텐츠 열 편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정리 — 45년 걸려 하나의 표준 문법이 됐다

지금까지 살펴본 20여 종의 게임을 관통하는 흐름은 하나다. 매번 규칙 중 하나를 깨는 게임이 나올 때마다, 그 게임이 장르의 다음 세대를 열었다.

'스펠렁키'는 턴제를 깼고, '로그 리거시'는 완전한 리셋을 깼고, '하데스'는 서사 불가능이라는 통념을 깼고,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는 조작 자체를 깼다.

그 결과 지금 '로그라이크'라는 태그가 붙은 게임 대부분은, 엄밀한 베를린 해석 기준으로는 사실 로그라이트다. 용어가 뒤섞인 채 굳어진 셈이지만, 그 뒤섞임 자체가 이 장르가 얼마나 유연하게 확장돼 왔는지를 보여준다.

장르 해설을 이어 보려면 소울라이크, 메트로배니아, 핵앤슬래시 ARPG 편도 함께 참고할 만하다. 넷 모두 반복 플레이를 어떻게 설계하느냐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푼 장르들이다.

정리하면 로그라이크는 기술적 제약에서 태어나 설계 철학이 된 장르다. 45년 전 저장 용량 문제가 만든 두 가지 규칙이, 지금은 던전과 카드와 초밥집 경영까지 전부 아우르는 가장 활발한 인디 문법이 됐다.

로그라이크 vs 로그라이트, 45년 연표
1980 '로그' — 절차적 생성 + 영구적 죽음, 이름의 출발점
1987~2015 넷핵·앙밴드·던전 크롤 스톤 수프·브로그·케이브스 오브 큐드 — 원류 계보
2008 베를린 해석(9가지 조건) 확정 · '스펠렁키' 등장 — 턴제·격자 이탈, 실시간 액션으로 첫 전환
2011~2018 아이작 · 엔터 더 건전 · 데드 셀 — 대중화 1세대
2012~2013 'FTL' → '로그 리거시' — 메타 프로그레션 발명, '로그라이트' 용어 탄생
2019~2024 슬레이 더 스파이어 · 발라트로 — 덱빌딩 결합
2020~2025 하데스 · 하데스2 — 서사형 로그라이트
2021~ 뱀파이어 서바이버즈 · 브로타토 — 뱀서라이크 신생 하위장르
기준: 메타 프로그레션(죽어도 영구 강화가 남는가)의 유무가 실질적 구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