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RPG'는 쓰임이 너무 넓다. 소울라이크도, 젤다도, 심지어 일부 JRPG도 이 이름으로 불린다. 그래서 디아블로 계열을 가리킬 때는 보통 '핵앤슬래시 ARPG'라고 좁혀 부른다. 그런데 이 이름도 정확하진 않다. 실제로 장르를 가르는 건 네 가지 조건이다.
네 가지가 모이면 이 장르다
첫째, 시점이다.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쿼터뷰가 기본이다.
이 시점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화면 안의 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야 다음 조건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둘째, 전투다. 적을 하나씩 상대하지 않는다. 무리를 쓸어담는다.
한 번의 스킬로 열 마리를 정리하는 감각이 이 장르의 핵심이다. 그래서 적이 많이 나오고, 많이 죽는다.
셋째, 보상이다. 아이템이 무작위로 떨어진다.
같은 몬스터를 잡아도 매번 다른 게 나온다. 옵션 수치까지 무작위인 경우가 많다. 이 불확실성이 반복 플레이의 동력이 된다.
넷째, 성장이다. 스킬 트리와 아이템 조합으로 캐릭터를 짠다.
같은 직업을 골라도 전혀 다르게 굴러간다. 이걸 빌드라고 부른다.
넷 중 하나만 있으면 다른 장르일 수 있다. 넷이 모였을 때 비로소 이 장르다.
소울라이크도 액션 RPG인데 왜 다른가
혼동이 잦은 지점이다. 소울라이크도 분명 액션 RPG다.
그런데 위의 네 조건에 대보면 대부분 어긋난다.
시점부터 다르다. 소울라이크는 캐릭터 뒤를 따라가는 3인칭이다.
전투 방향도 반대다. 소울라이크는 적 하나와의 대치가 핵심이다. 무리에 둘러싸이면 그건 실수한 상황이다.
보상 구조도 다르다. 소울라이크의 아이템은 대체로 정해진 위치에 정해진 물건이 있다. 무작위 드랍이 중심이 아니다.
즉 두 장르는 '액션 RPG'라는 큰 우산 아래 정반대 방향으로 서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 다루는 쪽을 부를 때는 '디아블로라이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장르를 만든 게임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이다.
로그라이크가 '로그'에서 이름을 따온 것과 같은 방식이다.
흥미로운 건 최근 흐름이다. PoE 2는 이 장르에 소울라이크의 문법을 일부 들여왔다.
전투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추고, 보스전에서 패턴을 익혀 타이밍을 잡는 설계를 택했다. 개발진도 소울라이크의 영향을 인정한다.
즉 두 장르가 정반대에 서 있다는 건 출발점의 이야기다. 지금은 서로의 문법을 조금씩 빌려 쓰고 있다.
디아블로가 만든 문법
출발점은 1996년 디아블로다.
무작위로 생성되는 던전, 무작위로 떨어지는 아이템, 클릭으로 굴리는 전투. 지금 이 장르의 뼈대가 이때 거의 완성됐다.
2000년 디아블로 2가 여기에 결정적인 걸 얹었다. 파밍이다.
룬워드와 세트 아이템을 얻기 위해 같은 구간을 수백 번 반복하는 구조가 이때 자리 잡았다. 지금도 이 장르의 이용자들이 하는 행동이다.
2013년 패스 오브 엑자일은 성장 쪽을 극단으로 밀었다.
노드가 1,325개 달린 거대 패시브 트리를 내놨다. 모든 직업이 같은 트리를 공유하고 시작 위치만 다르다. 빌드의 자유도가 장르의 경쟁 축이 된 시점이다.
여기에 시즌 리그라는 개념이 붙었다. 몇 달마다 새 규칙으로 처음부터 다시 키우는 방식이다.
이 구조가 지금은 장르의 표준이 됐다. 디아블로 4도, PoE 2도 시즌으로 굴러간다.
지금 이 장르는 어디에 있나
영상: Path of Exile 유튜브 채널
2023년 이후 이 장르는 다시 붐빈다.
디아블로 4가 시리즈를 되살렸고, 라스트 에포크가 시간 여행 소재와 15개 마스터리로 자리를 잡았다.
PoE 2는 전작의 복잡함을 더 밀었다. 패시브 노드가 1,500개를 넘는다. 대신 전투 속도는 늦췄다.
다만 PoE 2는 아직 정식 출시 전이다. 2024년 12월 얼리 액세스로 문을 열었고, 1.0 정식 출시는 2026년 12월 11일이다. 게임스컴 오프닝 나이트 라이브에서 발표됐다.
정식판은 무료로 풀린다. 기본 직업 12개와 승천 36종, 캠페인 6막, 보스 맵 100개 이상이 예고됐다. 검을 쓰는 듀얼리스트 직업도 이때 추가된다.
즉 이 장르의 판도는 올해 말에 한 번 더 흔들린다. 지금 입문한다면 이 일정을 감안하는 편이 낫다.
국내 시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라스트 에포크는 크래프톤이 배급에 참여하고 있다.
오래된 작품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림 던과 타이탄 퀘스트 계열은 신작이 나와도 이용자가 빠지지 않는 편이다.
이 장르의 특징이기도 하다. 한 번 빌드를 파기 시작하면 수백 시간이 들어가므로, 새 게임으로 갈아타는 비용이 크다.
반대로 말하면 신작 입장에서는 진입이 어려운 시장이다.
처음 시작한다면
이 장르는 어디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인상이 크게 달라진다.
PoE 2를 첫 작품으로 고르면 패시브 트리를 보고 압도당할 수 있다. 자유도가 높은 만큼 진입 문턱도 높다.
다만 PoE 2는 12월 11일 정식 출시를 앞두고 있다. 지금 시작하면 구조가 한 번 크게 바뀐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디아블로 4는 반대다. 성장 구조가 단순해 흐름을 익히기 좋다. 대신 오래 파면 단조롭다는 평이 따라붙는다.
라스트 에포크는 그 사이에 있다. 빌드 자유도는 상당한데 안내가 친절한 편이다.
판단 기준을 하나만 꼽으라면 '실패한 빌드를 되돌릴 수 있는가'다.
초기화가 쉬운 게임은 실험하며 배울 수 있다. 어려운 게임은 공략을 보고 따라가게 된다.
어느 쪽이든 이 장르의 재미는 결국 같은 자리에서 나온다. 내가 짠 조합이 화면을 쓸어버리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