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건스타 히어로즈'와 '전차로 GO!'로 이름을 알린 개발사 트레저는 세가새턴으로 완전히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사이드스크롤 액션 게임이지만, 캐릭터가 어느 방향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 공격 속성이 통째로 바뀌는 '실루엣 미라지(シルエットミラージュ)'였다.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다루면서도 보스들은 하나같이 유쾌하고 기괴하다는 독특한 톤으로 컬트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후 미국에서는 현지화 과정에서 게임 밸런스 자체가 크게 바뀌며 오히려 논란의 대상이 됐고, 지금은 구하기 힘든 희귀 수집템이자 '이카루가의 원형'으로 재조명받는 작품이다. 발매 27년이 지난 지금, 이 독특한 게임을 A부터 Z까지 정리했다.
① 트레저가 만든 실험작 — 새턴에서 시작된 프로젝트
'실루엣 미라지'는 1997년 9월 11일 일본에서 세가새턴 전용으로 먼저 발매됐다. 개발은 트레저, 퍼블리셔는 ESP(Entertainment Software Publishing)가 맡았다. 프로듀서는 기무라 코이치가 맡았고, 연출은 마사키 우쿄가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듬해인 1998년 7월 23일에는 '실루엣 미라지 ~Reprogrammed Hope~'라는 부제를 달고 플레이스테이션으로도 이식됐다. 새턴판의 일부 요소는 축소됐지만, 대신 두 종류의 PS1 전용 콘텐츠가 새로 추가됐다. 5스테이지를 컨티뉴 없이 클리어해야 등장하는 히든 보스 'Reaper'와, 새턴판 개발 과정에서 잘려나갔던 보스 '게루브'가 이끄는 새로운 분기 엔딩이다. 국내에는 정식 발매된 적이 없고, 세가새턴 자체가 비주류 플랫폼이었던 탓에 지금까지도 국내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 개발: 트레저 / 퍼블리셔: ESP(일본), 워킹 디자인스(북미)
· 일본 새턴판 발매: 1997년 9월 11일 / 일본 PS1판 발매: 1998년 7월 23일
· 북미 PS1판 발매: 2000년 1월 5일
· 음악: 스즈키 카츠히코·이리에 준·마츠타케 히데키
② 붕괴한 시스템 '에도', 갈라진 두 종족 — 줄거리
배경은 정체불명의 미래(작중 표기로는 '20XX년')의 지구다. 세계를 관리하던 컴퓨터 시스템 '에도(Edo)'가 치명적인 오작동을 일으키면서, 그 여파로 지구의 생명체들이 '실루엣'과 '미라지'라는 두 속성 중 하나로 변이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종족은 서로를 적대하는 전면전에 돌입한다.
주인공 샤이나 네라 샤이나는 에도의 하위 시스템 '게헤나'가 만들어낸 인공 생명체다. 스스로를 '정의의 사자'라 여기지만, 정작 기억을 잃은 채로 눈을 뜬다. 그는 실루엣과 미라지 속성을 동시에 지닌 유일한 존재이며, 이 설정이 곧 게임의 핵심 시스템인 속성 전환 능력의 근거가 된다.
여정 중에는 첫 스테이지 보스였다가 이후 동료가 되는 '버그', 미라지 진영의 수장 '할', 실루엣 진영의 수장 '메기도', 남성형 '메타트론'과 여성형 '산달폰'을 오가는 이중적 존재 '조하르' 등이 등장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에도가 원래 만들어낸 것은 양쪽 속성을 모두 지닌 단일 존재 '아마겟돈'이었으며, 이 존재가 둘로 갈라진 것이 곧 할과 메기도라는 진실이 드러난다. 결말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최종적으로 에도를 복구하는 데 성공하면 완전한 복구까지 93만 2,000시간이 걸린다는 자막으로 마무리된다.
③ 마주보면 실루엣, 등지면 미라지 — 색으로 나뉜 전투 시스템
이 게임을 상징하는 시스템은 제목 그대로 '실루엣'과 '미라지'다. 캐릭터가 오른쪽을 바라보면 원거리·에너지 공격인 미라지(빨강) 속성이 되고, 왼쪽을 바라보면 근접·물리 공격인 실루엣(파랑) 속성이 된다. 방향을 바꾸는 즉시 의상 색깔도 함께 바뀌어, 지금 어떤 속성인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독특한 데미지 규칙이 더해진다. 적과 반대되는 속성으로 공격해야만 체력(Health)에 피해를 줄 수 있다. 같은 속성으로 공격하면 체력은 깎이지 않는 대신, 상대의 '스피릿(Spirit)' 게이지를 소모시켜 공격력을 약화시킨다. 즉 무작정 같은 버튼만 누르는 게 아니라, 적의 속성을 파악해 방향을 전환하며 싸우는 것이 핵심이다. 상대를 화면의 유리한 위치로 옮기는 잡기·던지기·슬라이드 같은 비피해 기술과, 투사체를 되받아치는 반사 기술도 함께 쓰인다.
진행 중에는 상점 NPC '헤어 웨어스'(라면 포장마차 콘셉트의 토끼 캐릭터)에게서 '패러사이트'라는 보조무기를 구매할 수 있다. 각 패러사이트는 6단계로 강화되며, 스테이지를 진행할수록 더 강력한 종류가 풀린다. 적을 처치하기 직전 추가로 코인을 뽑아내는 '캐시 배시' 기술로 자금을 모아 상점을 이용하는 구조다. 이동기로는 3단 점프, 포복, 대시, 벽·천장 이동까지 지원한다. 전체 7개 스테이지로 구성돼 있으며, 숙련되면 한 시간 안팎에 클리어할 수 있는 비교적 짧은 볼륨이다.
④ 기묘하고 유쾌한 보스들 — 트레저다운 비주얼
세계 멸망급 설정을 다루면서도, 실루엣 미라지의 보스들은 하나같이 장난스럽고 기묘하다. 펑크록 콘셉트의 물고기 보스(북미판에서는 호주 억양으로 더빙됐다), 사무라이 도마뱀, 달리는 리무진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 수프를 빨아들이며 공격하는 적 등 진지한 종말론 서사와는 결이 다른 유머가 곳곳에 배어 있다. 이런 위트 넘치는 크리처 디자인은 '건스타 히어로즈'나 '레이디언트 실버건' 같은 트레저의 다른 작품들이 보여준 비교적 정통적인 비주얼과는 뚜렷하게 다른 지점이다.
이 독특한 속성 전환 시스템은 이후 트레저의 대표작 '이카루가(2001)'에서 흑백 폴라리티 전환으로 재활용·정교화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이카루가는 방향 전환이 아니라 버튼 하나로 즉시 속성을 바꾸는 방식을 택했는데, 다수의 평론가는 "같은 핵심 아이디어를 훨씬 더 완성도 높게 구현해냈다"고 평가한다.
⑤ 이식판이 통째로 다른 게임이 되다 — 워킹 디자인스의 미국판
워킹 디자인스가 손댄 북미판은 단순 번역을 넘어선 대대적인 재조정을 거쳤다. 가장 큰 변화는 밸런스다. 일본판에서는 같은 속성 공격이 적의 스피릿만 소모시켰지만, 북미판에서는 플레이어가 무기를 쓸 때마다 샤이나 자신의 스피릿도 함께 소모되도록 바뀌었다. 대신 같은 속성으로 적을 공격하면 스피릿이 회복되는 새로운 규칙도 추가됐다. 여기에 상점 가격 인상, 적 공격력 상향까지 겹치며 전체 난이도가 원작보다 크게 올라갔다.
콘텐츠 면에서도 손을 많이 댔다. 오프닝 애니메이션과 로딩 화면을 고해상도로 다시 인코딩했고, 진동 기능과 메모리카드 슬롯 선택 기능을 새로 넣었다. 개발 과정에서 발견한 디버그용 컨트롤러 기능을 활용해, 워킹 디자인스 직원이 하룻밤 만에 '슈퍼 코어 파이터 2'라는 숨겨진 2인용 대전 미니게임(샤이나 vs 조하르)을 만들어 넣기도 했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조하르를 직접 조작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시퀀스도 추가됐다. 다만 이런 보너스 대부분은 게임의 여러 엔딩을 모두 클리어해야 열리도록 설계됐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이름과 소재도 손봤다. 성서 속 인물·지명에서 따온 원작의 캐릭터명이 여럿 바뀌었고, 상점 주인 캐릭터가 들고 있던 담배는 빈 장갑 낀 손으로, 불타는 십자가 이미지는 용으로 대체됐다. 흥미로운 여담으로, 워킹 디자인스는 이 디스크 안에 자사의 다른 작품 '루나2: 이터널 블루 컴플리트'의 5분짜리 홍보 영상을 몰래 숨겨두기도 했다.
이런 변화에 대한 평가는 당시부터 극명하게 갈렸다. IGN은 "혁신적인 플레이 방식과 엄청난 깊이"라며 호평했지만, 게임스팟은 "미국판의 변경 사항이 가장 큰 결함"이라며 "원래 재미있던 게임이 보람 없는 노동이 됐다"고 혹평하고 차라리 일본 새턴판 수입을 권하기도 했다. 이 논쟁은 지금까지도 이 게임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다.
⑥ 평가와 오늘날의 유산 — 희귀 수집템이 된 컬트작
발매 당시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새턴판은 '세가새턴 매거진' UK 90%, '게임팬' 283/300점, '콘솔플러스' 85%를 받았고, 에지는 6/10점을 매기며 "정신없고 정교한 전투가 결국 단순 버튼 연타로 흘러버린다"고 짚었다. 미국 PS1판은 메타크리틱 종합 69점으로 다소 낮아졌는데, IGN 8.9/10, EGM 8/10, 게임 인포머 7.5/10처럼 후한 점수와 게임스팟 4.6/10처럼 낮은 점수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일본 '덴게키 플레이스테이션'은 두 명의 리뷰어가 각각 75점과 70점을 매겼다.
오늘날 이 게임은 오히려 그 존재감을 키워가는 쪽에 가깝다. 게임 인포머는 2006년 회고 기사에서 "가장 실력 있는 플레이어에게도 도전이 될 만큼 깊이 있고 복잡한 사이드스크롤 슈터"라고 평했고, 유로게이머는 2007년 "2D 게임으로서 세월을 잘 견뎌냈다"고 언급했다. 일본 '덴게키 온라인'은 2015년 새턴 명작 특집에서 한 필자가 이 작품을 '가디언 히어로즈'나 '레이디언트 실버건'보다도 좋아하는 트레저 새턴 게임으로 꼽기도 했다. 다만 전문 레트로 게임 매체 하드코어 게이밍 101은 "아이디어는 훌륭하지만 실전에서는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며 둔한 조작감과 지루한 캐시 배시 파밍을 단점으로 짚는 등, 무조건적인 향수와는 결이 다른 냉정한 재평가도 함께 이뤄지고 있다.
정식 리마스터나 재출시 계획은 아직 발표된 바 없다. 다만 2023년 11월에는 팬 커뮤니티가 새턴판 완역 패치를 완성해 공개하는 등, 원작을 향한 관심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유통량이 워낙 적었던 탓에 지금은 중고 시세도 상당히 높게 형성돼 있어, PS1 세대를 대표하는 희귀 수집템 중 하나로 꼽힌다.
· 평가: 메타크리틱(PS1) 69점, 매체별 4.6~8.9점으로 극과 극 평가 혼재
· 핵심 시스템: 방향에 따라 실루엣(파랑·근접)·미라지(빨강·원거리) 속성 전환
· 오늘날의 유산: '이카루가' 흑백 폴라리티 시스템의 원형으로 재조명, PS1 세대 대표 희귀 수집템
· 재발매 이력: 2010년 일본 PSN(PS one Classics) 이후 별도 리마스터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