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RPG'는 쓰임이 너무 넓다. 소울라이크도, 젤다도, 심지어 일부 JRPG도 이 이름으로 불린다. 그래서 디아블로 계열을 가리킬 때는 보통 '핵앤슬래시 ARPG'라고 좁혀 부른다. 그런데 이 이름도 정확하진 않다. 실제로 장르를 가르는 건 네 가지 조건이고, 그 조건은 1996년 게임 하나에서 거의 완성됐다. 30년 동안 이 문법이 어떻게 갈라지고 다시 합쳐졌는지, 실제 게임 15여 종으로 정리했다.
네 가지가 모이면 이 장르다
첫째, 시점이다.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쿼터뷰가 기본이다.
이 시점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화면 안의 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야 다음 조건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둘째, 전투다. 적을 하나씩 상대하지 않는다. 무리를 쓸어담는다.
한 번의 스킬로 열 마리를 정리하는 감각이 이 장르의 핵심이다. 그래서 적이 많이 나오고, 많이 죽는다.
셋째, 보상이다. 아이템이 무작위로 떨어진다.
같은 몬스터를 잡아도 매번 다른 게 나온다. 옵션 수치까지 무작위인 경우가 많다. 이 불확실성이 반복 플레이의 동력이 된다.
넷째, 성장이다. 스킬 트리와 아이템 조합으로 캐릭터를 짠다.
같은 직업을 골라도 전혀 다르게 굴러간다. 이걸 빌드라고 부른다.
넷 중 하나만 있으면 다른 장르일 수 있다. 넷이 모였을 때 비로소 이 장르다. 그리고 이 넷을 처음으로 한데 묶어낸 게임이 있다.
1996년 디아블로 — 로그라이크를 버리고 만든 문법
영상: FirstPlays HD 유튜브 채널
출발점은 1996년 12월, 블리자드 노스(당시 사명 콘돌게임즈)의 '디아블로'다.
이 게임의 원래 기획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개발사 콘돌(설립자 데이비드 브레빅)이 처음 구상한 '디아블로'는 턴제에 영구적 죽음(퍼머데스)까지 갖춘, 사실상 '로그'와 '넷핵'의 직계 후손이었다.
공교롭게도 '로그라이크'라는 장르를 만든 바로 그 설계에서 출발한 셈이다. 이 기획을 지금의 형태로 바꾼 건 퍼블리셔로 참여한 블리자드였다. 블리자드는 실시간 전투로 바꾸고 배틀넷 멀티플레이를 넣을 것을, 그리고 영구적 죽음을 빼 달라고 요구했다.
브레빅은 이 결정에 반대했다고 훗날 밝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변경이 지금 우리가 아는 '디아블로'를 만들었다.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몬스터를 베는 감각이 이때 확립됐다.
핵심 시스템 세 가지가 이 게임에서 동시에 자리 잡았다. 무작위로 생성되는 던전, 무작위로 떨어지는 아이템, 그리고 클릭으로 굴리는 실시간 전투다. 지금 이 장르의 뼈대가 이때 거의 완성됐다.
구조는 단순했다. 마을 트리스트럼과 그 지하의 16층 던전을 오가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강해지는 몬스터를 상대한다. 직업은 전사·도적·마법사 셋뿐이었다.
개발 막바지는 혹독했다. 브레빅은 "막판에는 8~9개월을 매일같이 크런치했다"고 회고했다. 1996년 8월부터 12월 출시까지가 특히 그랬다. 그 압박 속에서 게임 특유의 어둡고 절박한 완성도가 함께 만들어졌다.
출시 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단순해 보이는 '클릭으로 몹 잡기'가 왜 이렇게 중독적인지, 이후 수십 년간 이 장르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각자의 방식으로 찾아 나섰다.
2000년 디아블로 2 — '파밍'이라는 개념을 발명하다
2000년 디아블로 2는 전작의 뼈대에 결정적인 살을 붙였다. 파밍(farming)이라는 개념이다.
1편의 무작위 드랍이 '어쩌다 좋은 게 나오는' 수준이었다면, 2편은 여기에 목적을 만들었다. 룬워드는 특정 룬을 정해진 순서로 장비에 조합해야 완성되고, 세트 아이템은 같은 세트를 다 모아야 추가 효과가 붙는다.
이걸 얻으려면 같은 보스, 같은 던전 구간을 수백 번 반복해야 한다. 지금도 이 장르의 이용자들이 하는 바로 그 행동이 이때 자리 잡았다.
직업 구조도 확장됐다. 야만용사, 마법사, 아마존, 네크로맨서, 팔라딘, 드루이드, 어쌔신 등 7개 직업이 각자 독립된 스킬 트리를 갖고, 같은 직업이라도 트리를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캐릭터가 됐다.
확장팩 '로드 오브 디스트럭션'은 여기에 드루이드·어쌔신 직업과 8막 구조, 그리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엔드게임 보스 '헬 모드' 발디르 학살급 파밍 루틴을 더했다.
2021년에는 리마스터판 '디아블로 2: 레저렉션'이 나와, 원작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그래픽만 전면 재구축했다. 20년 넘은 설계가 지금 봐도 유효하다는 걸 역으로 증명한 사례다.
이때부터 이 장르는 '스토리를 깨는 게임'에서 '캐릭터를 완성하는 게임'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같은 시대의 경쟁자들 — 타이탄 퀘스트와 토치라이트
디아블로 2가 장르를 정의하자, 2000년대 중반 여러 스튜디오가 이 공식에 도전했다.
2002년 '던전 시즈'는 파티 구성원 전체를 동시에 조작하는 구조로 차별화를 노렸다. 로딩 없이 이어지는 넓은 지형도 당시로서는 인상적이었다.
2006년 '타이탄 퀘스트'는 아이언 로어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했다. 북유럽 신화 일색이던 이 장르에 그리스, 이집트, 오리엔트 신화를 끌어와 세계관을 넓혔다.
이 게임은 두 개의 직업 계열(마스터리)을 자유롭게 조합해 하나의 캐릭터를 만드는 구조로 호평받았다. 다만 개발사 아이언 로어는 후속작 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2008년 문을 닫았다.
비슷한 시기 토치라이트(2009)와 토치라이트 2(2012)도 있었다. 개발사 루닉 게임즈의 이력이 흥미롭다. 공동 창업자 맥스 셰이퍼와 에릭 셰이퍼는 데이비드 브레빅과 함께 블리자드 노스(옛 콘돌)를 공동 창업하고 '디아블로' 시리즈를 직접 만든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블리자드를 떠난 뒤 플래그십 스튜디오에서 '미토스(Mythos)'라는 후속작을 준비했지만, 스튜디오가 2008년 문을 닫으며 무산됐다. 그 팀이 다시 모여 세운 회사가 루닉 게임즈다.
토치라이트는 저렴한 가격과 가벼운 볼륨으로 '혼자서도 몇 시간 안에 즐기는 디아블로'라는 포지션을 잡았고, 2편은 협동 플레이를 더해 스팀 이용자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사랑받았다.
이 시기의 도전들은 대부분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이후 이 장르를 이어갈 인력들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이언 로어의 잔류 인력이 만든 회사가 바로 다음에 나올 '그림 던'의 개발사다.
소울라이크도 액션 RPG인데 왜 다른가
혼동이 잦은 지점이다. 소울라이크도 분명 액션 RPG다.
그런데 위의 네 조건에 대보면 대부분 어긋난다.
시점부터 다르다. 소울라이크는 캐릭터 뒤를 따라가는 3인칭이다.
전투 방향도 반대다. 소울라이크는 적 하나와의 대치가 핵심이다. 무리에 둘러싸이면 그건 실수한 상황이다.
보상 구조도 다르다. 소울라이크의 아이템은 대체로 정해진 위치에 정해진 물건이 있다. 무작위 드랍이 중심이 아니다.
즉 두 장르는 '액션 RPG'라는 큰 우산 아래 정반대 방향으로 서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 다루는 쪽을 부를 때는 '디아블로라이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장르를 만든 게임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이다.
로그라이크가 '로그'에서 이름을 따온 것과 같은 방식이다.
흥미로운 건 최근 흐름이다. PoE 2는 이 장르에 소울라이크의 문법을 일부 들여왔다.
전투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추고, 보스전에서 패턴을 익혀 타이밍을 잡는 설계를 택했다. 개발진도 소울라이크의 영향을 인정한다.
즉 두 장르가 정반대에 서 있다는 건 출발점의 이야기다. 지금은 서로의 문법을 조금씩 빌려 쓰고 있다.
2012년 디아블로 3 — 경매장이라는 실패와 그 이후의 반전
2012년 디아블로 3는 시리즈 최대 기대작으로 출시됐지만, 곧바로 최악의 오점을 남겼다. 실제 화폐 경매장(Real-Money Auction House)이다.
아이템을 게임 내에서 파밍하는 대신, 실제 돈을 주고 다른 플레이어에게서 살 수 있게 만든 시스템이었다. 2011년 발표 당시부터 논란이 있었지만, 블리자드는 이를 정식 출시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파밍한 아이템보다 경매장에서 산 아이템이 더 좋은 경우가 흔해지면서, 이 장르의 핵심인 '보상의 손맛'이 통째로 무너졌다. 개발 총괄조차 출시 두 달 만에 이 결정을 후회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경매장은 거의 2년간 유지됐다. 이유는 아이러니했다. 패키지 박스에 이 기능이 핵심 요소로 명시돼 있어서, 이를 없앨 경우의 법적 문제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경매장은 결국 2014년 3월 18일에야 폐쇄됐다. 그리고 같은 해 나온 확장팩 '리퍼 오브 소울즈'가 상황을 완전히 뒤집었다.
이 확장팩은 '루트 2.0'이라는 이름으로 아이템 드랍 시스템을 전면 재설계했다. 좋은 아이템이 훨씬 자주, 그리고 캐릭터 빌드에 맞게 떨어지도록 바꾼 것이다.
이 반전은 이 장르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파밍의 재미는 '아이템을 얻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내 손으로 얻었다는 감각'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있게 되는 순간, 그 감각은 사라진다.
2013년 패스 오브 엑자일 — 무료 배포와 거대 패시브 트리
뉴질랜드의 소규모 스튜디오 그라인딩 기어 게임즈가 만든 '패스 오브 엑자일'은 2013년 정식 출시됐다. 성장 쪽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게임이다.
가장 상징적인 건 패시브 스킬 트리다. 수천 개의 노드가 거미줄처럼 뒤엉킨 이 트리는, 모든 직업이 같은 트리를 공유하고 시작 위치만 다르다.
즉 '마법사가 힘 스탯을 찍어 근접 딜러가 되는' 조합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빌드의 자유도가 장르의 경쟁 축이 된 시점이다.
수익 모델도 파격적이었다. 게임 본편과 콘텐츠는 전부 무료이고, 수익은 인벤토리 창고 칸이나 캐릭터 외형 같은 비전투적 요소에서만 나온다. 아이템을 돈으로 사는 구조는 철저히 배제했다. 디아블로 3의 경매장 사태와는 정반대의 선택이었다.
여기에 시즌 리그라는 개념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몇 달마다 새로운 규칙(예: 특정 몬스터가 더 자주 나온다, 시간 제한 이벤트가 추가된다)으로 모든 캐릭터를 처음부터 다시 키우는 방식이다.
이 구조가 지금은 장르의 표준이 됐다. 디아블로 4도, PoE 2도 시즌으로 굴러간다.
그림 던 — 문을 닫은 스튜디오가 남긴 마지막 유산
앞서 '타이탄 퀘스트'를 만든 아이언 로어 엔터테인먼트가 2008년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잔류 인력들이 다시 모여 세운 회사가 크레이트 엔터테인먼트다. 처음엔 다른 스튜디오의 외주 작업으로 버티다가, 자체 프로젝트로 '그림 던' 개발을 시작했다.
이 게임은 실제로 타이탄 퀘스트의 엔진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분위기는 정반대다. 화사한 신화 세계 대신, 인류 문명이 붕괴한 음울한 세계관을 택했다.
2016년 정식 출시된 이 게임은 두 개의 직업 계열을 조합하는 방식(타이탄 퀘스트와 유사한 구조)과, 대형 스튜디오 수준의 밸런스 조정 없이도 탄탄한 빌드 다양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화려한 마케팅이나 대규모 라이브 서비스 없이도, 입소문만으로 오랫동안 이용자를 붙드는 드문 사례로 남았다. 대형 신작이 쏟아지는 지금도 그림 던은 꾸준히 이용자가 유지된다.
한국의 ARPG, '로스트 아크' — 쿼터뷰와 MMO의 결합
이 장르가 항상 싱글·소규모 협동으로만 남은 건 아니다. 스마일게이트 RPG의 '로스트 아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 문법을 확장했다.
2019년 12월 국내 정식 출시 당시 동시접속자 35만 명이라는, 당시 국내 게임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우며 그해 대한민국 게임대상을 비롯한 6개 부문을 휩쓸었다.
게임의 뼈대는 분명 핵앤슬래시 ARPG다. 쿼터뷰 시점, 무리를 쓸어담는 전투, 무작위에 가까운 장비 드랍까지 앞서 설명한 조건을 대부분 충족한다.
다만 여기에 MMORPG의 구조를 통째로 얹었다. 여러 플레이어가 함께 도전하는 군단장 레이드, 길드 시스템, 그리고 섬을 오가며 사이드 콘텐츠를 채우는 모험 요소까지 결합됐다.
2022년 2월에는 아마존 게임즈가 서구권 배급을 맡아 북미·유럽에 정식 출시했다. 출시 직후 스팀 동시접속자 132만 명을 기록하며, 역대 스팀 동시접속 2위(1위는 배틀그라운드)에 올랐다.
로스트 아크는 이 장르가 혼자 즐기는 파밍 게임에서 벗어나, 대규모 협동 콘텐츠의 뼈대로도 쓰일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사례로 꼽힌다.
과금 논쟁 — '디아블로 이모탈'이 보여준 극단
이 장르가 모바일·무료 플레이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논쟁이 불거졌다. 2022년 6월 출시된 '디아블로 이모탈'이 그 진앙이다.
게임 자체의 완성도는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엔드게임 과금 구조였다.
게임 매체 벨룰러 뉴스의 분석에 따르면, 캐릭터를 완전히 최종 강화하는 데 드는 비용이 약 11만 달러(1억 5천만 원 안팎)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무과금으로는 10년 가까이 플레이해야 도달 가능한 수준이었다.
핵심 문제는 최상위 등급 전설 보석이었다. 이 아이템은 직접 구매가 불가능하고, 확률형 상자인 전설 균열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구조였다.
이 확률형 구조는 실제 법적 제재로 이어졌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확률형 아이템(루트박스)이 도박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이 게임의 해당 지역 서비스를 아예 금지했다.
이 사례는 핵앤슬래시 ARPG의 핵심 재미인 '무작위 보상'이, 수익 모델과 잘못 결합했을 때 어떻게 정반대의 반발을 부르는지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로 남았다. 디아블로 3의 경매장 사태가 '아이템을 살 수 있어서' 문제였다면, 이모탈은 '너무 비싸야만 살 수 있어서' 문제였던 셈이다.
2023년 디아블로 4 — 오픈월드와 라이브 서비스
2023년 6월 출시된 디아블로 4는 시리즈 최초로 완전히 이어진 오픈월드를 택했다. 스테이지를 선택해 들어가던 이전 작들과 달리, 한 대륙을 말을 타고 자유롭게 가로지를 수 있다.
여기에 다른 플레이어와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월드 이벤트가 곳곳에 배치됐다. 완전한 싱글도, 완전한 MMO도 아닌 중간 지점을 노린 설계다.
성장 구조는 오히려 단순화됐다. 디아블로 2·PoE의 복잡한 패시브 트리 대신, 스킬 트리와 문단(Paragon) 보드로 접근성을 낮췄다.
출시 초기에는 "할 게 금방 떨어진다"는 평가가 따라붙었지만, 이후 시즌마다 새로운 메커니즘과 스토리를 더하는 라이브 서비스 구조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 방식은 PoE의 시즌 리그와 근본적으로 같은 아이디어(주기적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되 새로움을 더한다)를 대형 스튜디오 제작비로 구현한 결과이기도 하다.
라스트 에포크 — 시간 여행과 자동 정제 크래프팅
일레븐스 아워 게임즈가 만든 '라스트 에포크'는 2019년 4월 얼리 액세스로 시작해, 5년 가까운 개발 끝에 2024년 2월 21일 1.0으로 정식 출시됐다.
가장 독특한 설정은 시간 여행이다. 세계 '에테라'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되는데, 같은 지역이라도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직업 구조는 기본 5개 클래스(애콜라이트·메이지·프리멀리스트·로그·센티넬)가 각각 3개씩, 총 15개 마스터리로 승천한다. 스킬 트리는 100개가 넘는다.
이 게임이 특히 호평받은 지점은 크래프팅이다. 인벤토리 어디서든 즉시 접근 가능한 제작대에서, 아이템 옵션을 원하는 방향으로 예측 가능하게 다듬을 수 있다. 완전 무작위인 다른 게임들과 달리, '운'보다 '설계'에 가까운 강화 경험을 제공한다.
1.0 출시와 함께 거래·아이템 팩션 시스템도 새로 도입됐다. 자유 거래를 허용하는 팩션과, 거래를 포기하는 대신 아이템 발견 확률을 높이는 팩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구조다.
국내에는 크래프톤이 배급으로 참여하고 있다. 오래 파고들 자유도는 상당한데 안내가 상대적으로 친절해, 이 장르의 진입 장벽을 낮춘 사례로 꼽힌다.
패스 오브 엑자일 2 — 소울라이크를 들여온 후속작
영상: Path of Exile 유튜브 채널
그라인딩 기어 게임즈의 후속작 PoE 2는 전작의 복잡함을 더 밀어붙이면서도, 전투 철학은 정반대로 틀었다.
패시브 노드는 1,500개를 넘는다. 대신 전투 속도는 의도적으로 늦췄다. 몬스터 하나하나가 뚜렷한 예비 동작을 갖고, 이를 피하거나 받아내는 것이 훨씬 중요해졌다.
개발진은 이 변화가 '엘든 링' 같은 소울라이크의 전투 설계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 앞서 설명한 '무리를 쓸어담는 vs 하나와 대치하는'이라는 두 장르의 경계가, 이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흐려졌다.
PoE 2는 2024년 12월 얼리 액세스로 문을 열었고, 1.0 정식 출시는 2026년 12월 11일이다. 게임스컴 오프닝 나이트 라이브에서 발표됐다.
정식판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완전 무료로 풀린다. 기본 직업 12개와 승천 36종, 캠페인 6막, 보스 맵 100개 이상이 예고됐다. 검을 쓰는 듀얼리스트 직업도 이때 추가된다.
즉 이 장르의 판도는 올해 말에 한 번 더 흔들린다. 지금 입문한다면 이 일정을 감안하는 편이 낫다.
왜 이렇게 파밍이 중독적인가
30년째 이 문법이 유지되는 데는 설계상의 이유가 있다.
핵심은 가변 보상(variable reward)이다.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무언가 확실히 나오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매번 다르다. 심리학에서 도박이 중독적인 이유로 꼽히는 것과 같은 구조다.
다만 카지노와 다른 점이 있다. 이 장르에서는 돈을 잃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에도 '별로인 아이템'이 나올 뿐,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죄책감 없이 반복하게 된다.
여기에 즉각적인 시각·청각 피드백이 더해진다. 몬스터가 터지는 이펙트, 희귀 아이템이 떨어질 때 나는 특유의 효과음은 뇌가 보상을 인지하는 속도를 최대한 앞당기도록 설계돼 있다.
시즌·리그 구조는 여기에 마감 효과를 더한다. '이번 시즌이 끝나기 전에'라는 압박이 반복 플레이를 더 촉진한다.
결국 이 장르가 파는 것은 몬스터를 죽이는 손맛보다도, '다음 판엔 더 좋은 게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 자체다. 디아블로 3의 경매장이 실패하고 디아블로 이모탈이 논란이 된 이유도, 결국 이 기대감의 구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한다면
이 장르는 어디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인상이 크게 달라진다.
PoE(1)을 첫 작품으로 고르면 패시브 트리를 보고 압도당할 수 있다. 자유도가 높은 만큼 진입 문턱도 높다. PoE 2는 12월 11일 정식 출시를 앞두고 있어, 지금 시작하면 구조가 한 번 크게 바뀐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디아블로 4는 반대다. 성장 구조가 단순해 흐름을 익히기 좋다. 대신 오래 파면 단조롭다는 평이 따라붙는다.
라스트 에포크는 그 사이에 있다. 빌드 자유도는 상당한데 크래프팅 시스템이 예측 가능해 안내가 친절한 편이다.
로스트 아크는 결이 조금 다르다. 혼자보다는 함께 하는 콘텐츠(레이드)에서 진가를 발휘하니, 협동을 즐긴다면 좋은 선택이다.
가볍게 맛만 보고 싶다면 토치라이트 2나 그림 던처럼 완결된 원 타임 구매형 게임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즌 압박 없이 내 속도로 진행할 수 있다.
판단 기준을 하나만 꼽으라면 '실패한 빌드를 되돌릴 수 있는가'다.
초기화가 쉬운 게임은 실험하며 배울 수 있다. 어려운 게임은 공략을 보고 따라가게 된다.
어느 쪽이든 이 장르의 재미는 결국 같은 자리에서 나온다. 내가 짠 조합이 화면을 쓸어버리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