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슬롭(Gameslop)'. 최소한의 사람 손길만 거친 채 생성형 AI로 뚝딱 찍어낸 저품질 게임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밸브가 2026년 1월 16일부터 스팀에 AI 생성 콘텐츠 공시를 의무화한 이후, 3월 기준으로 벌써 7,300개가 넘는 게임이 이 라벨을 달았다. 문제는 밸브가 이 콘텐츠를 막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정확히 공시하기만 하면, AI로 찍어낸 게임도 그대로 스팀에 올라간다.

16개 중 10개 — 넥스트 페스트에서 체감한 AI 범람

스팀 넥스트 페스트에서 16개 게임 중 10개(62.5%)에 AI 생성 콘텐츠 경고가 떴다는 것을 시각화한 그래픽
▲ 2026년 6월 스팀 넥스트 페스트에서 무작위로 게임을 골라 확인한 결과 62.5%가 AI 경고 대상이었다. 자료: Kotaku
핵심 수치 출처
스팀 공식 AI 공시 게임 수 (2026년 3월)7,300개+StraySpark Studio
2025년 신작 중 AI 공시 비율20.9%Totally Human Media
넥스트 페스트 체험작 중 AI 경고 비율62.5%Kotaku (16개 중 10개)
확장 프로그램 자체 집계 (2025년 12월)10,258개Outlook Respawn
게이머 중 게임 내 AI에 부정적85%본문 참고
개발자 중 생성형 AI가 업계에 해롭다는 응답52%GDC 2026

이 현상을 가장 체감하기 좋은 자리는 신작 데모가 쏟아지는 '스팀 넥스트 페스트'다. 게임 매체 코타쿠(Kotaku) 기자가 2026년 6월 넥스트 페스트 메인 허브에서 무작위로 16개 게임을 클릭해봤다. 그중 10개, 즉 62.5%에서 AI 생성 콘텐츠 경고 팝업이 떴다.

해당 기자는 "더 이상 사람만이 만든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미래가 두렵다"며 "AI 경고가 계속 뜨는 걸 보는 게 몹시 우울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런 흐름은 다른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시장조사업체 토탈리 휴먼 미디어(Totally Human Media)에 따르면 2025년 신작 중 AI 공시가 붙은 비율은 약 20.9%다. 신작 5개 중 1개꼴로 AI 콘텐츠가 들어갔다는 뜻이다.

소규모 개발팀들이 인력·예산 부족을 이유로 AI 활용을 늘리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는 애초에 '임시 대체용'으로만 쓰겠다며 넣은 AI 콘텐츠가 정식 출시 빌드에까지 그대로 남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라벨은 붙이되 막지는 않는다 — 스팀의 2단계 공시 체계

스팀 AI 공시 정책의 Tier 1(사전 생성 콘텐츠)과 Tier 2(실시간 생성 콘텐츠) 구분을 설명하는 그래픽
▲ 스팀의 AI 공시 정책은 사전 생성 콘텐츠와 실시간 생성 콘텐츠를 구분해 표시하도록 한다. 자료: StraySpark Studio

밸브의 공시 정책은 2026년 1월 16일부터 시행됐으며, AI 활용을 두 단계로 나눠 표시하도록 한다.

'사전 생성 콘텐츠(Tier 1)'는 개발 과정에서 AI로 만든 뒤 사람이 검토·편집해 최종 빌드에 고정된 형태로 들어가는 텍스처·대사·음악 등을 가리킨다. 반면 '실시간 생성 콘텐츠(Tier 2)'는 플레이 도중 AI 모델이 그때그때 만들어내는 NPC 대사, 절차생성 퀘스트, 동적 음악처럼 사람의 사전 검토를 거치지 않은 결과물을 말한다.

다만 예외도 명확하다. 깃허브 코파일럿이나 클로드 코드 같은 AI 코딩 어시스턴트, 에디터 자동화 도구, 빌드·파이프라인 최적화 도구, 그리고 전통적인 절차생성 알고리즘 기반 도구는 공시 대상에서 제외된다. 개발자가 업무 효율을 높이려고 AI를 쓰는 것과, 플레이어가 실제로 마주하는 콘텐츠에 AI를 쓰는 것을 구분하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밸브가 이 정책을 철저히 '정보 공개' 차원에서만 접근한다는 점이다. 공시만 정확하면 콘텐츠 품질과 무관하게 게임은 그대로 판매된다.

라이브서비스 대작도 예외는 아니다 — 'THE FINALS'의 AI 음성

THE FINALS 게임 스크린샷, 도심 빌딩이 파괴되는 전투 장면
▲ 'THE FINALS'는 인게임 캐스터 스카티·준의 음성 일부에 텍스트 음성 변환(TTS) 기술을 사용했다고 스팀에 공시했다. 사진: Embark Studios

AI 공시가 소규모 인디게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임바크 스튜디오(Embark Studios)의 대작 슈팅 게임 'THE FINALS'는 스팀 AI 공시란에 "개발 과정에서 절차생성·AI 기반 도구를 콘텐츠 제작에 활용하며, 인게임 캐스터 스카티(Scotty)·준(June)의 음성 일부를 텍스트 음성 변환(TTS) 도구로 만든다"고 명시하고 있다.

개발사는 AI 음성이 실제 성우 연기와 임바크 직원들의 임시 음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성우 업계에서는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반발이 뒤따랐다.

하이레즈 스튜디오의 '트라이브즈3: 라이벌즈(TRIBES 3: Rivals)' 역시 인게임 배너와 아이콘 일부를 AI로 사전 생성한 뒤 아트팀이 다듬는 방식으로 제작했다고 공시했다.

두 사례 모두 정식으로 공시를 마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AI 활용 자체보다, 그 사실을 얼마나 투명하게 알리느냐가 스팀에서는 더 중요한 기준인 셈이다.

공시를 깜빡했다가 역풍 맞은 '디 얼터스'

디 얼터스 게임 스크린샷, 외계 행성 표면에 세워진 원통형 기지 구조물
▲ '디 얼터스'는 배경 텍스트와 인게임 영상 번역 자막에 AI를 썼다는 사실을 스팀 공시란에 밝히지 않아 논란이 됐다. 사진: 11 bit studios

반대로 공시를 빠뜨렸다가 곤욕을 치른 사례도 있다. 11비트 스튜디오(11 bit studios)의 SF 서사 게임 '디 얼터스(The Alters)'는 2025년 6월 출시 이후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곧이어 배경 설명 텍스트와 인게임 영상 번역 자막에서 챗GPT 프롬프트 흔적이 발견되며 논란에 휩싸였다. 스팀 정책상 공시가 의무였음에도 출시 당시 게임 페이지에는 관련 고지가 전혀 없었다.

개발사는 블루스카이(Bluesky)를 통해 사과문을 올리고, 두 사례 모두 사실상 '임시 대체용'이었다고 해명했다. 배경 텍스트는 출시 전 교체됐어야 할 것을 담당자가 놓친 단순 실수였고, 영상 자막은 정식 번역이 마감 시한에 맞춰 완성되지 못해 급하게 AI 번역으로 대체했다는 설명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는 앞서 코타쿠 기자가 지적한 "'임시 대체용'으로 넣은 AI가 정식 빌드에 그대로 남는 문제"의 실제 사례이기도 하다.

유저들이 직접 만든 방어선 — 'AI Warning for Steam' 확장 프로그램

밸브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유저들은 스스로 필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개발자 'seeeeew'가 만든 무료 브라우저 확장 프로그램 'AI Warning for Steam'은 크롬·파이어폭스에서 작동한다. 스팀 게임 페이지에 접속하면 AI 콘텐츠 사용 여부를 알리는 큰 팝업을 띄워 페이지 나머지 부분을 흐리게 가린다. 이용자가 AI 사용 내역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페이지를 제대로 볼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이 확장 프로그램이 스팀 페이지를 자체적으로 훑어 집계한 결과, 2025년 12월 2일 기준 이미 1만 258개 게임에서 AI 콘텐츠가 감지됐다. 스팀 전체 라이브러리의 약 8%에 해당하는 규모다.

다만 이 수치를 앞서 언급한 '7,300개(2026년 3월)'와 곧바로 비교하면 안 된다. 두 수치는 조사 주체와 집계 방식 자체가 다르다.

집계 주체 게임 수 기준 시점 집계 방식
스팀 공식 공시 시스템 7,300개+ 2026년 3월 개발자가 스팀에 직접 등록한 공시 건수
'AI Warning for Steam' 확장 프로그램 10,258개 2025년 12월 2일 확장 프로그램이 스팀 페이지를 자체 스크래핑

두 수치를 시간 순으로 이어 붙여 증가 추세로 읽기보다는, 조사 주체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다는 정도로 참고하는 게 정확하다. 이 도구는 웹 브라우저에서만 작동하고 스팀 데스크톱 앱에서는 쓸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이런 자구책이 나오는 배경에는 소비자들의 뚜렷한 거부감이 있다. 게이머의 85%가 게임 내 AI 활용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앞서 본지가 다룬 GDC 'State of the Game Industry' 2026 설문에서도 게임 개발자의 52%가 생성형 AI를 업계에 해로운 존재로 꼽은 바 있다.

다수의 이용자에게 'AI 생성'이라는 라벨은 이제 '저품질 콘텐츠'를 뜻하는 경고 신호로 굳어지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