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5일 스팀 얼리 액세스로 출시된 '슬레이 더 스파이어 2'는 뜻밖의 지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게임의 내러티브 기능인 '타임라인'에 들어간 삽화가 누가 봐도 그림판으로 급하게 그린 듯한 투박한 손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개발사 메가 크릿(Mega Crit)은 이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생성형 AI를 쓰지 않겠다는 의도적인 선택이었다고 당당히 밝혔다.
"형편없어도 인간의 그림" — 케이시 야노가 밝힌 선택의 이유
이 투박한 삽화 대부분은 메가 크릿 공동 창업자 케이시 야노(Casey Yano)가 직접 그렸다. GameSpot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해도, 실제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생성형 AI 그림보다는 형편없는 인간의 그림이 낫다고 생각하는 여러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확고한 반(反)AI론자는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아트는 표현이며, 이는 코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발 과정의 다른 영역에서 AI가 쓸모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팀은 생성형 AI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은 분명히 했다.
· "형편없는 인간의 그림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생성형 AI 그림보다 낫다"
· "아트는 표현이다 — 코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 반AI 성향이지만 전면적 AI 반대론자는 아니며, 개발의 다른 영역에서 AI의 유용성은 인정
· 다만 팀 차원에서 생성형 AI 아트는 쓰지 않는다는 원칙 고수
▲ '슬레이 더 스파이어 2' 공식 얼리 액세스 트레일러.
왜 하필 플레이스홀더에 이 원칙을 적용했나
투박한 플레이스홀더 아트는 단순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일종의 신뢰 신호다. 야노는 "명백히 미완성으로 보이는 것"이 얼리 액세스에서는 오히려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콘텐츠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억지로 감추는 대신, "우리가 이걸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이해해달라, 그리고 우리는 그걸 가장할 수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플레이어에게 솔직하게 전달하는 셈이다. 또한 이런 거친 삽화는 정식 아티스트들이 참고할 구도·색감·디테일의 뼈대 역할도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팬들의 반응은 개발사의 기대 이상이었다. 해외 매체들은 "거친 손그림이 다른 어떤 발표보다도 더 많은 긍정적인 언론 보도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투명성과 정직함 자체가 마케팅 포인트가 된 흔치 않은 사례인 셈이다.
정식 아트는 다르다 — 아트 디렉터 영입과 대대적 그래픽 개선
손그림 플레이스홀더가 화제였을 뿐, 정작 '슬레이 더 스파이어 2'의 정식 비주얼은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공들여졌다. 전작은 야노 스스로도 한계를 인정한 부분이다. 그는 과거 "타락한 힘을 받은 기사 캐릭터를 스프라이트로 그리려다 결국 포기했다"며, 인간형 캐릭터를 그릴 경험이 부족했던 탓에 전작의 스토리텔링 자체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고 돌아봤다.
이번 후속작을 위해 메가 크릿은 3년 전 '다이시 던전스' 작업 경력의 마를로우 도베(Marlow Dobbe)를 아트 디렉터로 영입했고, 카드 일러스트레이터 아나일리스 도르타(Anaïlys Dorta)와 애니메이터 크리스 고르츠(Chris Gortz)도 합류시켰다. 도베는 "사랑받는 게임의 후속작에서 새로움과 익숙함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독특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 더 장난스러운 톤을 더하면서도 어두운 세계관은 유지하고, 회화적이던 스타일에서 벗어나 선명한 디자인으로, 애니메이션과 화면 전환도 대폭 늘리는 방향으로 그래픽이 개선됐다.
업계는 지금 AI 아트로 시끄럽다 — 유비소프트·라리안 사례
메가 크릿의 선택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는, 같은 시기 다른 대형 스튜디오들이 AI 아트 문제로 잇달아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다. 유비소프트는 '아노 117'의 로딩 화면에 생성형 AI 이미지를 별도 고지 없이 사용한 사실이 드러났고, 11비트 스튜디오(11 Bit Studios)는 '디 얼터스'에 AI 생성 텍스처를 사용했다가 플레이어들의 지적을 받고서야 이를 인정했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라리안 스튜디오다. '발더스 게이트 3'의 성공 이후 '디비니티' 프로젝트에 생성형 AI를 활용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불과 몇 주 만에 거센 팬 반발에 부딪혀 해당 결정을 철회해야 했다.
팬 반응과 남은 과제 — 신뢰가 곧 생존인 인디 개발사들
대형 퍼블리셔와 달리 인디 개발사에게 커뮤니티의 신뢰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메가 크릿의 이번 선택은 "완벽하지 않아도 정직하게 보여주겠다"는 메시지로 읽히며, 오히려 역설적으로 홍보 효과까지 얻은 흔치 않은 사례가 됐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 2'는 현재 5명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575종 이상의 카드, 278종의 유물, 63종의 물약과 함께 최대 4인 온라인 협동 플레이를 지원하며 얼리 액세스 중이다. 개발사는 얼리 액세스 기간을 1~2년으로 예상하고 있어, 정식 1.0 출시는 2027~2028년경이 될 전망이다.
플레이스홀더 아트가 정식 버전으로 교체되는 과정을 투명하게 지켜볼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얼리 액세스의 독특한 매력 중 하나로 꼽힌다. AI 아트를 둘러싼 논란이 업계 곳곳에서 반복되는 지금, 메가 크릿의 이번 행보가 다른 개발사들에게 어떤 참고 사례가 될지 주목된다.